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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uto/조각

[오비카카] Drink me!

by MaEl 2016. 7. 4.

[오비카카] Drink me!

 


일어나. 웃고 있는 걸까?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소년이 생각했다. 느릿한 말투, 천천히 흘러들어오는 소리. 앞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더니 눈이 부셨다. 찡그렸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낯설지 않은 목소리. 온통 캄캄했을 때 들려왔던 소리와 닮았다. 그리고. 아득히 먼 곳에서 자신을 불렀던 그 목소리와도 닮았다.

 

제대로 앞을 바라볼 수 있게 되자 소년은 더 혼란스러웠다. 분명 아는 얼굴인데.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부스스한 하얀 머리카락, 눈을 가로지르는 상처. 머리 양쪽에 달린 고양이 귀와 흔들리는 꼬리가 소년의 눈에 박혔다. 저건 뭐야?

드디어 일어났구나, 앨리스. 소년은 쫑긋 솟아오른 까만 귀로 뻗던 손을 멈추었다. 앨리스? 그게 누군데? 누구겠어, 내 앞에 서 있는 너지. 소년은 이질감에 떨었다. 자신을 앨리스라 부르는 저 생물을, 자신은 알았고, 동시에 몰랐다. 앨리스란 이름마저 낯설었다.

내 이름은 체셔고양이야.”

거짓말.”

소년은 알 수 있었다. 거짓말이야. 근거는 없지만 알 수 있었다. 네 이름은 그게 아니잖아.

 

믿기 싫으면 말고. 자신을 체셔고양이라고 소개한 이는 망설임 없이 뒤로 돌아 흔적을 감추었다. 눈앞에서 흐려지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도 소년은 놀라지 않았다. 머리 한구석에 남아있는 체셔고양이와 닮은, 혹은 본인일지도 모르는 사람은 저것보다 더 빨리 사라지곤 했으니까. 소년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니까 그게 대체 누군데? 하얀 머리카락 아래로 옅은 입술이 미소 지었다. ㅡㅡㅡ. 소년은 여전히 자신의 이름을 알 수 없었다.

 

 

 

우선,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소년은 걸었다. 아무리 걸어도 지치지 않았다. 문득 바닥을 기어가는 달팽이가 보여, 무릎을 굽혔다. 그랬더니. 그랬더니. 고개를 꺾어야 달팽이 전부를 볼 수 있었다. 화들짝 놀라 다시 일어서니 달팽이는 여전히 조그맣게, 천천히, 기어가고 있었다. 쿡쿡. 웃음소리가 들렸다. 소년은 그것이 체셔고양이라는 것을 공중에 떠 있는 까만 고양이 귀로 알 수 있었다. 언제까지 따라올 건데?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잔뜩 날이 서 있는 소년의 말을 듣더니 체셔고양이는 다시 웃음을 흘렸다. 살랑살랑. 얄밉게 흔들리는 꼬리를 콱, 잡고 싶었다. 몇 번의 시도로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소년은 그저 다시 작은 다리를 뻗어 걸을 뿐이었다.

작은 다리? 그러고 보니 자신은 왜 어린아이지? 그러니까…….

콰앙!

물음에 관해 좀 더 깊게 생각할 여유도 없이 소년은 굉음에 정신이 팔리고 말았다. 지면이 꺼졌을지도 모르고, 솟았을지도 몰랐다. 피어오른 흙먼지 사이로 나타난 저택은 오로지 흰색과 검은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소년은 몸을 떨었다. 저곳에서는 자신조차 색을 잃어버릴 것 같았다. 혹시 다른 길은 없을까. 뒤를 돌아봤다. 소년은 숨을 삼켰다. 온통 새까맸다. 체셔고양이! 다급하게 불러보았지만 제 편할 대로만 나타나는 고양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서 있는 곳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아 소년은 저택으로 달렸다. 보지도 않고 달렸다. 어느 순간 저택에 들어선 소년은 문지방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매끈한 대리석 바닥에 손을 부딪친 소년은 작은 신음을 내뱉으며 일어났다. . 소년은 목에 걸린 헛웃음을 삼켰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줄 알았지? 또다시 장난스러운 체셔고양이의 목소리. 소년은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홱, 꺾었다. 여전히 까만 귀와 꼬리밖에 없었다. . 혀를 차며 시선을 제자리로 돌렸는데. 소년의 눈이 크게 뜨였다. 유리 탁자, 와 그 위에 올려진 작은 병. 소년은 조심스레 다가가 관찰했다. 작은 종잇조각이 구멍이 뚫려 하얀색 끈으로 병에 묶여 있었다. Drink me. 소리를 내어 읽은 소년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울 수 없었다. 말도 안 돼. 누가 이걸 마신단 말이야? 시선은 병 안 액체에 고정되어 있으면서. 체셔고양이는 웃었다. 온통 흑백인 세상에 오직 하나. 액체만이 색을 가지고 있었다. 달콤할 것 같은 분홍색. 마셔봐. 속삭였다. 소년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체셔고양이에도 잠자코 있었다. 소년이 작은 병을 쥐었다. 그래, 마셔봐. 코르크 뚜껑을 열었다. 그래, 쭉 들이켜. 앨리스. 소년은 멈칫했다. 입술까지 대었던 병을 떼고 체셔고양이를 노려봤다. 나는 앨리스가 아니야. 체셔고양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눈앞이 핑, 돌았다. 미처 다 마시지 못한 액체가 오비토의 목을 타고 흘렀다. 체셔고양이의 모습이 흐릿했다가, 뒤틀리고, 위아래가 바뀌었다가. 한 번의 깜빡임으로 소년은 떨어졌다. 아래로. 아래로.

한없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소년은 꽉 다물었던 눈을 떴다. . 체셔고양이가 눈앞에 있었다. 깜짝 놀란 소년이 소리를 지르려다가 깨달았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여기선 말을 해선 안 돼. 꼬리가 흔들렸다. 너는 하고 있잖아. 눈빛으로 항의했지만 체셔고양이는 그것을 못 본 척했다. 소년은 그제야 주위를 둘러봤다. 새카만 공간에 둥둥 떠다니는 물건들. 부러진 의자. 쏟긴 찻잔. 망가진 시계, 올이 풀린 모자. 솜이 삐져나온 인형. 한 조각이 빠진 퍼즐. 찢어진 카드. 소년은 괴기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에 몸이 굳었다. 체셔고양이는 다정한 미소를 걸었다. 처음이었다. 그것에 정신이 팔린 소년은 자신이 어느새 바닥에 앉아있다는 것도 몰랐다. 체셔고양이는 소년에게 다가갔다. 미안해. 잘못 데려왔구나. 그는 소년의 눈을 자신의 손으로 덮었다. 소년은 여전히 알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이를테면, 체셔고양이의 진짜 이름. 구름처럼 새하얀 머리카락에, 눈동자를 가로지르는 상처를 가진 그의 이름. 따뜻한 목소리를 가진 그의 이름. 체셔고양이는 손에 힘을 주었다. 너는 앨리스가 아니야. 오비토.

 

.

 

 

오비토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그렇게 식은땀을 흘렸어? 악몽이라도 꿨나봐. 익숙한 목소리. 오비토는 고개를 돌려 카카시를 쳐다봤다. 이상한 꿈을 꿨어. 오비토는 자신의 팔뚝을 만졌다. 탄탄한 근육이 그대로였다. 그래, 그래. 그만 일어나. 오늘도 임무 있잖아. 카카시가 뒤로 돌아 문고리를 잡았다. 먼저 나가 있을게.

카카시.”

.”

야옹, 해봐.”

카카시는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망설임 없이 문고리를 돌렸다. 빨리 나오기나 해, 오비토. 그는 여전히 침대 위에 앉아 생각했다. 입속에서 굴려보았다. 카카시. 카카시. . 까먹을 리가 없지. 아직도 어린 아이일 리가 없지. 혼자 고개를 끄덕인 오비토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욕실로 향했다. 방 한구석에 작은 종잇조각이 흘러들어온 바람에 날아갈 듯 파르르, 흔들렸다. Drink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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