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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uto/조각

[오비카카] 있음에도 없는

by MaEl 2016. 3. 13.

[오비카카] 있음에도 없는

 


01.

나른한 음악이 매끈한 검은 탁자에 반사된 빛을 타고 흘렀다. 그것에 부드러운 소리를 더하며 넥타이를 끌러낸 카카시가 술잔을 기울였다. 반쯤 남은 액체는 우주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비싼 거 드시네요, 오늘은. 평소 친분이 있었던 오너가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카카시는 옅게 웃었다.

먹어보고 싶었거든요.”

어쩐지 흐릿한 시야에 오너가 눈을 비볐다. 그는 그대로 웃고 있을 뿐이었다.

 

 

02.

카카시는 마음먹었다. 죽기로 마음먹었다. 죽임을 당하기로 마음먹었다. 수개월 이어온 줄다리기를 줄을 놓아버리는 셈이었다. 지금도 주머니 한쪽에는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작은 나이프가 있었다. 그런데도. 포기한다고. . 그는 고개를 저었다. 포기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03.

평소와 같은 날이었다. 사내들이 득시글거리는 바에서 몸을 일으켜 빠져나왔다. 네온사인의 불빛을 피해 어두운 골목길 구석에 섰다. 요즘 영 기분이 나지 않는다며 담배를 꺼내 무는 순간. 느꼈다. 느낄 수 있었다. 쇠붙이의 날카로운 감각. 피부가 따끔할 정도로 강한 살기. 그리고, 즐거움. 속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생각도 전에 행동이 튀어나갔다. 어둠 속에서 튄 빛은 화려한 거리로까지 뻗어 나가지 않았지만. 카카시는 상대방이 어둠 속에서 숨죽여 웃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새카만 모자를 고쳐 쓴 사내는 잔뜩 고양되어 있었다.

형씨, 사람 죽여본 적 있지?”

그는 매끈한 칼날 끝을 까딱거렸다. 간단한 동작 하나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것이 눈앞에서 흔들리는데도 카카시의 눈동자에서 두려움 한 조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사내는 확신했다. 묻는 말에 확실하게 답해주지 않았지만. 언제 꼭 대답을 들어야 했던가. 사내는 다시 한 번 가볍게 팔을 내질렀다. 살을 가르는 소리 대신 날붙이끼리 부딪쳐 만들어낸 소음에 오비토는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역시.

기대하라고, 형씨.”

카카시는 어김없이 침묵으로 답했다. 여유롭게 손을 흔든 사내가 골목길 끝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카카시는 제 손목을 붙잡았다. 떨리고 있었다. 흥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04.

자신의 발 앞에 놓인 것은 시체였다. 카카시는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렀다. 깔끔해. 나날이 늘어가는 실력이다. 경찰인데도 불구하고 살인을 저지른다. 그 모순이 주는 자극은 카카시의 모든 감각을 곤두서게 했다. 놀라 뜬 눈으로 생을 마감한 이의 눈꺼풀을 내려준 카카시는 유유히 피비린내로 꽉 채워진 방을 떠났다. 오늘은 칵테일에 바다를 담아볼까. 아니면 밤하늘을 담아볼까. 우주는 마지막 즐거움으로 남겨둬야지.

 

 

05.

너무 노골적인 거 아니야?”

, 드디어 말했네.”

맞받아쳐 진 칼을 거두었다. 사내는 장난이 섞인 웃음을 내뱉었다. 나름 기척을 숨긴다고 숨겼는데. 부드러운 살을 뚫고, 근육을 찢는 감각을 생각하면 열이 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벌써 몇 번째인지 셀 수도 없을 만큼 그와 칼을 부딪쳤다. 이만큼 섹스를 했으면 쉽게 죽일 수 있었을까? 기막힌 언사에 카카시가 사내를 빤히 쳐다봤다. 게이바 앞이라서 농담이 통할 줄 알았다며 어깨를 으쓱한 그는 손을 흔들며 카카시를 뒤로하고 걸어갔다.

사내는 생각했다. 쉬웠으면 재미없었을 거라고.

 

 

06.

우치하 오비토. 카카시는 사건 파일을 뒤적였다. 최근 3달에 사망자만 총 11. 희대의 연쇄살인마였다.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모두 난도질당하고 토막 난 사체의 사진을 보며 카카시는 눈살을 찌푸렸다. 보기 안 좋아.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 비벼 껐다.

[최근 1, 동일인의 소행이라고 여겨지는 사건 없음.]

 

 

07.

오비토는 사냥감을 물색했다. 장소는 주로 주류 가게 근처 골목. 가끔은 가게 안까지 들어가 찾아보곤 했다. 여자든 남자든 상관하지 않았으며, 젊은이든 늙은이든 그의 타겟이 될 수 있었다. 쭉 훑어보고 느낌이 좋으면 죽였으니까. 검은 모자, 검은 마스크, 장갑, 셔츠, 바지, 운동화까지. 시뻘건 피가 튀어도 상관없는 색으로 온몸을 두른 그는 연신 살려달라고 고개를 숙이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 내가 왜? 웃으며 재갈을 물렸다. 꽉 물고 있어. 아플 거야. 소리 지르지 마. 나 시끄러운 건 싫어해.

새벽의 거리는 차갑다. 오비토는 웃었다. 곧이어 짜릿한 감각이 그의 온몸을 지배했다. 근육을 찢는 소리가 그의 귓바퀴를 파고들었다. , , . 들어 올린 날붙이 사이로 째진 비명이 끼어들었다. . 씨발. 욕지거리를 뱉은 오비토가 방향을 틀더니 그대로 내리꽂았다. 동시에 비명이 멎었다. 그것이 만족스러운 오비토는 다시 행위에 집중했다. 베고, 찌르고, 찢고, 찢고, 베고, 파고들고, 찔러서, 찢어라. 찢어. . 찢어라. . !

 

세상에서 가장 붉은 꽃으로 꽃꽂이한 것 같다. 적어도 오비토는 그렇게 생각했다. 선명함을 잃어버린 칼을 미련 없이 버렸다.

 

 

08.

가게 안까지 들어갔을 때였다. 오비토는 석양을 마시고 있는 카카시를 발견했다. 희끄무레한 사내놈. 카카시의 첫인상이었으며, 그는 느꼈다. 평소 사냥감을 정할 때와는 다른, 묘한 흥분감을 느꼈다. 외설적인 행동을 일삼는 주변과는 달리, 혼자 다른 세상을 사는 듯 고요한. 그가 석양을 먹어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오비토는 그와 행동을 같이했다.

 

 

09.

다크서클이 깊게 내려앉은 중년이 철제 서류로 책상을 내려쳤다. 그는 울분했다. 언제까지 연쇄살인마들의 뒤나 쫓아야 하냐고. 카카시는 그의 어깨에 조심스레 손을 얹고 이야기했다. 힘내라고. 꼭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잡아야 한다고. 고맙다며 쓰게 웃으며 회의실을 빠져나가는 그의 등에 대고 카카시는 웃었다. 나야.

 

 

10.

이거 너지? 오비토가 종이를 건넸다. 기사를 그대로 프린트해 온 것이었다. 눈으로 쭉 훑은 카카시는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종이를 돌려주었다. , 역시. 차가운 벽에 대고 종이비행기를 접었다. ‘살인이라는 글자는 사선으로 접혀 알아볼 수 없었다.

 

 

11.

그러니까. 카카시는 이런 결말을 맞이하게 될 줄은 몰랐다. 자신의 배에 칼을 꽂아 넣은 오비토는 울고 있었다. ……정말? 핏방울일 수도 있다. 말을 뱉었으나 소리가 되지는 못했다. 의사를 전하지 못했다. 허나 카카시는 이야기했다. 손을 뻗었다. 울지 마. 나는, 나는.

 

살아갈 거야.

 

 

12,

이제는 정말 인사처럼, 오비토는 칼을 내둘렀다. 언제나 내쳐졌던 칼날이었기에 오비토는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다. 그랬는데. 손잡이를 타고 올라온 감각은 너무도 익숙한, 사람의 살을 파고드는 감각. 그는 영원과도 같은 시간을 견뎌야 했다. 천천히 시선을 올리자 붉은 선혈이 보였고, 옅은 미소가 보였다. 그대로 뒤로 쓰러지는 카카시를, 오비토는 지켜보았다.

 

13.

? 오비토는 물었다. 어째서? 오비토는 물었다. 대답 없는 이를 향해. 묻고, 물었다. 끊임없이 충동질하던 마음은 결국 오비토의 의지마저 빼앗았다. 난도질당한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멈출 수 없었던 자신을 원망했다. 그토록 바라던 것이었잖아. 그의 몸을 조각내길 원했잖아. 시뻘건 피로 색칠하길 원했잖아. 바람대로 되었음에도. 오비토는 허무한 한편을 어찌할 수 없었다. 날붙이가 커다란 소음을 내며 오비토의 손에서 떨어졌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카카시의 입술에 자신의 것을 포개었다.

 

 

14.

오비토의 그림자가 일렁였다. 빛을 등지고 새카매진 그것은 곧 옅게 퍼지더니 골목 전체로 뻗어 나갔다.

 

 

15.

그는 묶인 몸을 바르작거렸다. 자신에게서 빼앗은 중절모를 쓰고 깊은 미소를 머금은 눈앞의 사내가 두려웠다. 입에 문 재갈은 이미 침에 젖어 축축해졌다. 금방 끝낼게. 먼지가 쌓인 전등의 희미한 빛을 받은 은색이 그것을 반사했다. 깔끔한 직선을 그리며 낙하한 것은 뼈마저 잘라내었다. 오비토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뭉개진 곳 하나 없이 절단된 것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16.

중절모를 쓰고 여유롭게 자리를 벗어나는 오비토다. 길어진 그림자가 벽을 타고 움직였다. 묵직한 발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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