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비카카] 너울
ㅡ 지인 분들께 나눠드렸던 배포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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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칙적이면서도 한편으론 그렇지만도 않은. 단단한 돌에 부딪혀 파하는 소리가. 카카시는 숨을 죽이고 가만히 그것에 귀를 기울였다.
01.
“뭐, 항로표지관리원?”
그렇게 젊은 사람이 왔단 말이야? 생선살을 밥과 함께 입으로 구겨 넣으면서 오비토가 웅얼거렸다. 마다라는 그의 머리를 숟가락 뒤쪽으로 탁, 쳤다. 아야! 튄 밥풀이 탁상에 안착하는 모습을 보며 마다라는 고개를 내저었다. 한번 찾아가 보지 그러느냐? 시간 나면요. 오비토는 맑은 국물을 시원하게 넘겼다. 잘 먹었습니다. 다녀올게요.
선착장에 묶어둔 배를 출발시켰다. 탈탈거리며 돌아가는 엔진소음 속에서 오비토는 그물을 정리하다 문득 등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시간에는 자고 있으려나.
“돌아올 때쯤엔 볼 수 있겠지.”
이미 높이 해가 떠올라 밝디밝은 수평선을 향해 오비토가 뱃머리를 돌렸다. 오늘도 만선이길. 그가 언제나처럼 중얼거렸다.
출렁이는 파도를 타고 배를 몰았다. 과하지도,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은 어획량에 오비토는 나름 만족했다. 온종일 통발을 건진 보람이 있었다. 실한 놈들만 걸렸으니 값을 좀 받을 테다.
반짝. 멀리서 환한 불빛이 반짝였다. 아차. 오비토가 키를 돌렸다. 등대가 아니었으면 길을 잃을 뻔했다. 밤바다는 어두우니깐. 아니 솔직히 밝을 때는 길 안 잃는다구? ……진짜로. 보는 이 하나 없지만 괜히 무안해진 오비토가 고개를 끄덕이며 합리화했다. 커다란 박스 안에서 오징어들이 출렁 헤엄치며 오비토를 비웃었다. 배가 탈탈 소리를 내며 밤바다를 거닐었다.
예상했던 대로 새벽시장에서 나름 값을 받은 오비토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오랜만에 할배랑 고기나 구워 먹을까. 배 사고로 양친을 잃고 우는 자신을 데려다 키워준 마다라가 오비토는 고맙기만 했다. ……물론 가끔 얄미울 때도 있지만.
시장을 거의 빠져나왔을 때, 벌써 자리를 펴고 준비하는 할머니가 오비토의 눈에 들어왔다. 문득, 그의 머리 한쪽에서 등대가 그려졌다. 음, 가볼까.
“할머니, 왜 이렇게 일찍 나오셨어요.”
오비토는 웃는 낯으로 서글서글하게 말을 붙였다. 눈가며 입가에 주름이 자글한 그녀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오비토를 맞이했다. 사과 좀 주세요. 오냐. 느릿한 손놀림으로 건네는 검은색 봉투를 받아 든 오비토가 값을 치르고 ‘수고하세요’, 인사하며 자리를 떴다.
여기저기 때가 탄 하얀색 등대. 지금 막 잠이 들었으면 어쩌나 싶다가도 제 손에서 부스럭거리는 봉투가 아까워 오비토는 원통형 건물 안으로 발을 들어놓았다. 녹이 슬어 뻑뻑한 문을 열었다. 아, 숙소에 있으면 어쩌지? 이왕 들어온 거 올라가 보자. 그는 딱딱한 계단에 발을 올렸다. 둥글게 이어진 그것을 따라 올랐다.
오비토가 회랑에 들어섰을 때, 한 사내가 얇은 붉은색 난간에 기대어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짠 내가 실린 바람에 부드럽게 흔들리는 새하얀 머리카락을 보면서 오비토는 고요함을 느꼈다. 그래서, 쉽사리 말을 걸지 못했다.
“저, 기.”
왼눈에 안대를 한 사내가 오비토를 돌아보았다. 오비토는 숨을 들이켰다. 잔잔히 부는 바람과 함께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이였다. 그는 어색하게 미소 지으면서 ‘새로 왔다고 해서 보러왔어요. 사과도 가져왔는데, 먹을래요?’ 하고 겨우 문장을 끝맺었다. 오비토의 손끝에서 검은 봉투가 대롱대롱 흔들렸다. 하얀 사내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간단한 감사인사 한마디에 오비토는 자신의 얼굴에 열이 몰리는 것을 느꼈다. 매일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어울리다가 오랜만에 젊은 사람을 보니 대하기 힘들었다. 어색했다. 만선이라는 이야기, 연락을 안 하는 자식들 욕 말고 무슨 대화를 해야 좋을까.
칼 있어요? 안에요. 사내가 들어가자며 등탑 안을 가리켰다. 오비토는 의아해하다 계단을 올라오던 중에 봤던 작은 공간을 떠올렸다. 이부자리도 있었지. 사내가 앞장섰다.
자그만 공간 안에 사내 둘이 끼어 있으려니. 오비토는 제 몸을 구겨 넣으려다 끝에 걸터앉았다. 무릎을 세우고 엎드려 손을 쭉 뻗던 하얀 사내는 손에 과도를 잡아 그것을 오비토에게 건넸다. 아, 고마워요. 과도를 받은 오비토가 잘 익은 사과를 깎기 시작했다. 두 사람 사이에 사각거리는 소리만 남게 되자 그것이 못내 견디기 힘들었던 오비토는 질문을 꺼냈다.
“몇 살이에요?”
나름 국민 질문 아닌가? 물었는데도 한동안 답이 없는 사내 때문에 오비토는 진땀을 흘렸다. 그가 다른 질문을 해야 하나 고민하며 두 번째 사과를 깎을 때쯤에야 사내가 입을 열었다.
“27살이요.”
네? 오비토는 깜짝 놀라 사내를 돌아보았다. 언제나 있는 반응인지 그럴 줄 알았다는 눈빛으로 그가 웃었다. 어어, 진짜 그렇게 안 보이는데. 하얀 머리카락의 사내는 많아 봐야 20대 중반의 외모였다. 정말 많이 양보해서. 많이. 당황한 오비토는 세 번째 사과를 깎기 시작했다. 반 쯤 깎았을 때 그는 겨우 할 말을 골랐다. 저랑 동갑이네요. 말 놓을까? ……그래.
“이름 뭐야?”
“하타케 카카시.”
조금 짧아진 대답이 돌아왔다. 오비토는 말을 놓자고 권한 몇 분 전 자신의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싶었다. 세 번째 사과를 다 깎고 과도를 돌려주면서 그는 ‘나는 우치하 오비토.’ 하고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일회용 접시에 나름 예쁘게 깎아 올린 사과를 카카시에게 내밀었다. 먹어, 이르자 기다란 손가락이 깔끔하게 깎인 사과를 집어갔다. 잘 깎네. 내가 집안일 다 하거든. 팔자에도 없는 주부습진도 생겼다니까. 오비토는 여기저기 갈라진 손바닥을 카카시에게 보여주었다.
지금도 한가롭게 텃밭에 물이나 주고 있을 마다라를 생각하니 열불이 터졌다. 꿍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오비토를 보던 카카시가 미소를 지었다.
예쁜 사람이었다. 오비토는 그렇게 생각했다. 바람이 불면 훅 날아갈 것 같다가도 팔뚝에 단단히 자리한 근육을 보면 또 그건 아니었다. 연한 잿빛에 가까운 하얀 머리카락이나 어딘가 흐릿한 시선이, 카카시를 ‘예쁘다’라고 정의 내리게 했다.
“올라가서 먹을래?”
보이는 것이라곤 계단밖에 없는 곳이었다. 작게 뚫린 네모난 구멍은 그래도 선선한 바람을 가져다주었지만. 위로 올라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오비토는 ‘여기에서 자는 거야?’ 하고 카카시에게 물었다. 가끔. 카카시는 과도를 제자리에 두기 위해 뒤로 돌아있었다. 그래서, 오비토는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다시 올라온 회랑에는 접이식 의자 하나가 덜렁 놓여있었다. 조금 전 그를 불렀을 때, 저 의자에 앉아있었겠지. 바닷바람에 살랑이는 하얀 머리카락이 오비토의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아, 나머지 이미지를 방해했다. 어느새 붉은 페인트칠 된 난간에 다가간 카카시가 오비토에게 손짓했다.
해가 뜨고 있었다. 옅게 깔린 태양이 바다를 비추었다. 짙푸른 바다와 따스한 주홍색이 만나 이루는 오묘한 색을, 카카시는 응시했다. 오비토는 그에게 사과를 내밀었다. 먹어. 아, 고마워. 곧 익숙한 소리가 철썩이는 파도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삭, 하고.
“왜 그 나이에 등대지기야?”
“……그냥.”
바다가 보고 싶어서. 순수한 호기심을 머금은 눈이 꾸밈없이 자신을 직시하자 카카시는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아삭. 한입 크게 사과를 베어 물었다. 정적.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가 오비토의 어깨를 짓눌렀다.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싶은데, 쉽사리 꺼낼 수 있는 화제가 없었다. 흘끗. 문득, 오비토는 그가 왼눈을 가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대는 왜 한 거야? 눈병? 카카시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난처해 보이는 표정에 오비토는 ‘대답하지 않아도 돼’, 하고 말았다.
* * *
가서 데려와라. 그물 정리를 끝낸 오비토에게 마다라가 일렀다. 사과를 나눠 먹은 이후로, 카카시의 얼굴 보기가 껄끄러웠던 오비토는 입술을 불퉁 내밀었다. 길 걷다가 만나도 서로 가볍게 목례만 하고 지나가기 일쑤였다. 길었던 침묵은 유쾌한 기억이 아니었다.
“내가?”
“그럼 네가 가지. 내가 가겠느냐?”
“할배, 운동 좀……. 아씨, 알겠다고.”
마다라의 눈이 천천히 가늘어지는 것을 본 오비토는 금방 꼬리를 내렸다. 어쩔 수 없었다. 저기서 조금만 더 가늘어진다면 그의 일장연설이 시작된다는 것을 오비토는 알고 있었다.
좁은 골목길을 내려와 해안가로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슬리퍼를 신고 작은 돌이 박힌 비포장도로를 터벅터벅 걸었다. 지면과 슬리퍼 바닥 사이에서 마찰하는 흙의 소리가 썩 괜찮다. 오비토의 신발에 채인 작은 돌멩이가 저 멀리 앞쪽으로 굴러갔다.
처음 봤을 때도 그랬지만, 카카시에게는 어딘가 다가가기 힘든 구석이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바로 알아챌 만큼 강력하게 거부 의사를 표하는 것도 아닌데. 질문하면 대답도 해주는데. ……아닐 때도 있지만. 대놓고 사람을 무시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카카시가 머물고 있을 숙소로 향하면서 오비토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결국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군데군데 페인트칠이 벗겨진 벽. 얼룩덜룩한 자국이 자리한 건물. 흡사 컨테이너와도 같은 곳이었다. 오비토는 카카시가 여기서 제대로 지낼 수 있을까, 하고 의심했다. 손잡이가 달린 쇳덩어리를 두드렸다. 정적. 순간 불어오는 바람에 오비토가 몸을 떨었다. ……없나? 그는 목을 쭉 뻗어 등대 쪽을 바라보았다. 꺼져있는데. 애초에 이 시간에 등대에 있을 리가 없다. 오비토는 손목시계의 시침이 5를 가리키는 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똑똑. 그리고 정적.
“자나?”
새로운 가설을 세운 그는 속는 셈 치고 차가운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끼익. 녹이 슬어 듣기 싫은 소리를 내는 문에 화들짝 놀란 오비토가 저도 모르게 집안으로 뛰어들어 문을 다시 닫았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던 그의 시야에 가지런히 자리한 운동화 한 켤레가 들어왔다. 뭐야, 있잖아. 고개를 들어 이리저리 살폈다. 아담한 싱크대. 책이 가득한 책장. 그 옆에 놓인 매트리스 위에 카카시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많이 피곤한가? 몇 번 낮에 카카시를 마을에서 마주친 적이 있는 오비토였다. 괜찮아 보이던데. 오늘은 등대일이 고됐을지도 몰랐다.
5분만 기다리자. 그래도 안 일어나면 자고 있다고 하는 거야. 카카시의 환영을 겸해서 열리는 잔치였지만 꼭 그가 올 필요는 없었다. 잔소리는 조금 듣겠지만. 내일도 있고, 다음 주도 있잖아? 이름만 잔치지, 그냥 친한 사람들 몇 명이 모여 같이 밥을 먹는 것뿐이었다. 벌써 수년 이어져 내려온 주말 치레 같은 것이었다.
현관에서 1분쯤 서 있던 오비토는 금세 지루해지고 말았다. 책 구경이나 할까. 활자와의 인연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는 그였지만. 슬리퍼를 벗고, 발소리를 죽였다. 뒤척이는 소리에 그의 몸이 흠칫, 굳었다. 천천히 고개만 돌려 바라본 매트리스. 카카시가 몸을 돌려 오비토 쪽으로 누웠다. 상처. 안대가 있던 자리에 새겨진 파인 상처. 오비토는 눈을 돌렸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알아버린 찜찜한 기분이었다. 그는 어서 눈앞의 두꺼운 책들로 관심을 쏟았다.
책장은 오비토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제목의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의학? 무슨, 영어? 카카시가 여기에 오기 전에 대체 무슨 일을 했던 건지 궁금해졌다. 딱 봐도 지루해 보이는 책을 대충 다 눈으로 훑었을 때, 오비토는 첫 번째 서랍 오른쪽 끝에 놓인 얇은 책 하나를 발견했다. 오, 얇다. 자신도 읽을 수 있는 책인가 싶어 손을 뻗어 집었다.
“뭐하는 거야.”
“와악, 깜짝이야!”
느닷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오비토가 놀라 책을 떨어트렸다. 상처를 손으로 가린 카카시가 매섭게 오비토를 노려보았다. 아하, 하. 아니 할배가 너 데려오라길래. 어색하게 웃으면서 책을 주우려 무릎을 굽혔다. 응? 이거 누구야? 떨어진 책에서 삐쭉 튀어나온 사진. 환히 웃고 있는 다갈색 단발 머리카락의 여자였다.
“내놔.”
어느새 안대를 차고 자리에서 일어난 카카시가 사진을 빼앗아 다시 책에 끼우더니 곧장 책장에 집어넣었다. 가시를 세운 카카시의 말과 행동에 찔린 오비토가 속으로 아야, 하고 중얼거렸다.
그래서? 나 왜. 말에서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아직 늦가을인데도 오비토는 한겨울의 추위를 맛봐야 했다.
“너 왔다고, 마을 사람들이 맛있는 거 만들었나 봐.”
“…….”
“많이 준비 안 했다고는 하는데,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쌓인 접시들을 떠올리며 오비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평소 저녁상은 아니었지. ……갈래? 흘깃, 카카시의 눈치를 본 오비토가 덧붙였다. 갈게. 앞에서 기다려, 하며 문을 가리키는 것에 오비토는 얌전히 그가 나올 때까지 바닷바람을 맞았다.
* * *
시끌벅적. 왁자지껄. 왕왕 떠드는 분위기가 어색한 것인지 카카시가 연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넉살 좋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그의 등을 손바닥으로 팡팡 치며 잘 왔다며 인사를 했다. 카카시가 웃으면서 그것에 화답했지만, 그의 입가가 잘게 떨리는 것을 오비토는 보고 말았다.
“오비토 형.”
“오랜만이다ㅡ.”
켁. 오비토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느닷없는 사촌 동생의 등장에 잔치 분위기가 한층 더 열기를 더했다. 오오, 이타치! 시스이! 왔냐! 직장을 구한답시고 섬을 나간 그들은 마을 사람들의 믿음을 안고 보란 듯이 도시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마다라가 너보다 어린 녀석조차 열정을 품고 밖으로 나가는데 너는 비린내 나는 배만 몰아서 되겠느냐, 하며 눈을 흘기는 것에 ‘나는 고기잡이가 좋다’고 외친 것이 아직 생생하게 오비토의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오비토는 얼른 두 사람의 뒤를 살폈다. 사스케, 그 망할 놈의 꼬마가 온다면 평화롭게 지내려고 했던 주말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자신보다 한참 나이가 어린데도 꼬박꼬박 대드는 태도에 오비토도 울컥한 것이 한두 번 일이 아니었다. 어른인 자신이 참자, 하고 넘겨도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여유로운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는 것에는 도리가 없었다.
“사스케는?”
“아, 무슨 시험 준비한다고 안 온대.”
다행이다. 오비토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기분이 나아진 그는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카카시에게 먹어, 먹어, 하며 음식을 권유했다. 저기 생선 맛있어. 미역국도 고소하지 않아? 어어, 그래.
“누구야?”
“새로 온 등대지기.”
아. 오비토의 대답에 이타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젋네, 하는 것에 오비토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나랑 동갑이래. ……형이랑? 야, 쟤가 동안인 거지. 내가 노안인 거 아니다. 카카시는 이타치와 눈이 마주치자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했다.
고구마의 단내가 훅 풍겨왔다. 저녁상을 치운 자리에는 후식이랍시고 고구마와 배가 올라왔다. 카카시는 배부른데, 하면서도 주위에서 좀 먹어보라 권유하는 것에 어쩔 수 없이 내미는 것을 받아들었다. 아궁이에서 갓 꺼내 뜨거운 것을 호호 불었다. 살짝 내리깐 눈. 속눈썹이 그림자처럼 눈동자를 가렸다. 오비토는 시선을 고정했다. 그것을 느낀 건지 고개를 드는 카카시에 오비토는 당황하며 배를 집었다. 카, 카카시, 뜨거우면 이거랑 같이 먹어. 포크에 배를 찍어 쭉 내밀었다. 아, 고마워. 카카시는 호일에 감싼 고구마를 잠시 내려놓고 포크를 잡았다. 시원하고 다디단 배가 달아오른 입안을 식혀주었다.
“맛있다.”
그럼 좀 가져갈래? 그랴, 아 좀 주소. 삐쩍 말랐다 아이가. 카카시의 짧은 말이 끝나자마자 주변에서 가져가라고 난리였다. 인기 많네. 오비토가 하하 웃으며 말했다. 카카시는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등대에 불 밝히러 갈 시간이 됐다고 카카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양손에는 뭐가 가득 들어 부푼 봉투를 쥔 채다. 벌써 가노. 좀 더 있다 가지. 죄송해요, 일이라서. 카카시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연신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던 마다라가 오비토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데려다줘라. 아, 또 왜. 마다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오비토는 번개처럼 백기를 들었다.
일찍 찾아온 밤하늘엔 별들이 총총 박혀있었다. 짙은 남색과 보라색이 절묘하게 섞인 하늘에 놓인 보석 같았다. 재밌었어? 음, 조금 지쳤지. 아하하. 그런 것 같더라. 오비토가 유쾌하게 웃었다.
“줘, 하나 들어줄게.”
“됐어.”
“들어준다니까.”
결국 카카시의 손에서 봉투를 하나 빼앗아 든 오비토가 휘파람을 불었다. 맑고 잔잔하게 흘러가는 소리다. 카카시는 문득, 묻고 싶었던 질문 하나를 마음속에서 빼 들었다. 동생들이야? 가만히 걸어가던 카카시가 내뱉은 물음에 오비토가 응? 했다. 안 닮은 것 같아서. 아아.
“나 여기 입양된 거야.”
부모님, 돌아가셨거든. 멈칫. 느릿하지만 잘만 앞으로 뻗어 나가던 카카시의 발걸음이 멎었다. 오비토가 두어 발자국 앞서 나가자 그는 다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걸었다. 휘파람 소리도 이어졌다. 등대가 우뚝 자리한 해안가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파도소리가 아늑한 선율에 겹쳤다.
“낚시 갈래?”
등대에 도착할 때쯤, 계속 앞서 걷던 오비토가 카카시를 돌아보며 물었다. 일요일에 자주 가는데. 이번 주는 사촌들이 와서 안 될 것 같고, 다음 주 어때? 씨익 웃는 오비토의 눈동자가 달을 머금었다. 어둠이 깔린 밤인데도 불구하고 카카시는 눈이 부셨다. 좋아, 하고 대답했다.
잘 들어가. 응, 너도. 오비토는 들고 있던 봉투를 다시 카카시에게 넘겨주고 그가 등대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얼마 뒤 등대에 환하게 불이 밝혀졌다. 카카시가 회랑에 서서 아직 돌아가지 않은 오비토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등대의 불빛에 묻혀 카카시는 새카맣게 보였다. 오비토도 휘적휘적 손을 마주 흔들었다.
* * *
바다를 보고 싶어. 카카시는 몇 번이고 속으로 되뇐 말을 다시 곱씹었다. 몇 번을 되짚어 헤진 말인데도, 떠올릴 때마다 선명하게 가슴에 박혔다. ……너는 그럴 사람이 아니잖아. 그런데 어째서?
파도가 밀려와 단단한 돌에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다. 거기에 귀 기울일수록 생각나는 것은 해처럼 밝게 웃던 그녀의 모습이었다.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진 너다. 카카시는 제법 차가운 바닷바람이 자신의 몸을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몸이 기울었다. 고요하다면 고요한 풍경에 탈탈거리는 소리가 섞여들었다. 부둣가에서 배 하나가 육지와의 거리를 멀리하고 있었다. 오비토일까? 카카시는 낡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등대의 불빛을 등지고 있어 캄캄한 시야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새벽 3시. 어젠 자신이 숙소로 돌아갈 때쯤이었으니 6시였는데. 정말 제멋대로다. 카카시는 그런 그가 싫지 않았다. 자신이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등대로 찾아온 오비토다. 사과를 가져왔었지. 숙소에도 멋대로 찾아왔었다. 자신의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했었다. 어색한 시선이었지만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눈이었다.
도피처임과 동시에 속죄할 장소이기도 한 바다다. 카카시는 그것 사이로 사라지는 배 한 척을 바라보다 이내 등을 돌려 계단을 내려갔다.
* * *
린, 나 왔어. 카카시는 새하얀 병실 문을 손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커다란 창을 향해 있던 린의 고개가 천천히 그를 향했다. 왔구나, 하고 린은 촛불이 흔들리는 것처럼 웃었다. 쓰라렸다. 카카시는 가슴 한편이 쓰라려 도무지 마주 웃어줄 수가 없다.
미안해.
고개를 쳐들고 올라오는, 자신의 몸속을 역주행하는 뜨거운 덩어리를 억지로 삼켰다. 음료수 사 왔어. 탁자에 올려둘게. 고마워, 카카시. 린은 손을 뻗어 탁자를 더듬었다. 그것에 카카시는 입술을 짓씹었다. 따뜻한 유리병의 뚜껑을 열어 린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다시 고맙다, 인사했다.
“어디 갈지 정했어?”
“응. 나, 바다가 보고 싶어.”
바다? 겨울인데. 카카시의 시선이 무심코 창밖을 향했다. 세찬 바람에 흔들리는 앙상한 가지. 오늘따라 유난히 강한 바람은 창문을 사납게 내리치고 있었다. 파도소리가 듣고 싶어서. 바다, 좋아하거든. 음료를 홀짝이며 린이 중얼거렸다. 한쪽 손은 침대의 시트를 꽉 쥔 채였다. 거기선 어쩐지 결연한 의지마저 느껴져 카카시는 알았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울었으면 좋겠다. 카카시는 하루에 몇 번이고 생각했다. 그럼 내일 데리러 올게, 린에게 이르고 병실 문을 빠져나오면서 카카시는 다시 생각했다. 차라리, 울어. 린. 한순간에 모든 것이 암흑으로 덮여버린 상실감을, 자신은 알 수도 없었지만. 그는 벽에 몸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미안해.
다행히 다음 날은 날씨가 흉흉한 기세를 풀어, 카카시가 생각한 것보다 따뜻했다. 조금 높은 곳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던 린이 문득, 데려와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버스는 불편하지 않았어? 카카시야 말로. 나야 뭐, 괜찮았지. 나도 좋았어. 린은 오른손을 카카시가 있는 곳에 내밀었다. 반듯하게 뻗은 손은 그가 자리한 곳에서 조금 벗어나, 카카시는 씁쓸하게 웃었다. 주머니 안에서 데워 따뜻한 손으로 린의 그것을 맞잡았다. 서늘함. 벌겋게 달아오른 손.
“더 가까이서 보고 싶어. 바다.”
린은 작은 모래알갱이들에 스며들어 사라지는 파도를 보았다, 아니, 들었다.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그 소리를 질린 기색 하나 없이 그저 들었다. 카카시는 그녀 옆에 서서 시커먼 바다를 응시했다. 어둡게 가라앉은 겨울 바다는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만 같아서 그는 순간 아찔해졌다. 아이보리색 목도리에 둘러싸인 린은 어여쁜 눈동자를 감추고. 깊디깊은 바다를 바라보고, 듣고.
뭐 따뜻한 음료라도 사올게. 여기 계속 있을래? ……응, 그럴게.
카카시는 불안한 듯 연신 린이 서 있는 것을 돌아보며 가까운 슈퍼로 뛰어갔다.
금방 온장고에서 꺼내 아직 따뜻함을 간직한 음료를 가지고 서둘러 바닷가로 돌아온 카카시다. 분명 떠났던 자리로 돌아왔는데. 철썩이는 소리만 가득할 뿐 어디에도 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손에서 떨어진 유리병 2개가 소리도 없이 모래 해변에 박혔다.
린. 어디 갔어! 린! 목이 터지라 불렀다. 몇 없는 사람을 붙잡고 물었다. 갈색 단발머리의 여자를 보지 못하셨나요. 키는 제 가슴까지 오구요. 상냥한 사람이에요. 눈이 보이지 않을 텐데……. 하나같이 고개를 좌우로 젓는 그들에 카카시는 절망했다. 얼마 되지도 않는 해변을 끝에서 끝으로 달리며 애타게 찾아 헤맸다. 어두워진 해안가는 바다도, 하늘도 검게 물들어 더 이상 지평선을 구분할 수 없었다.
ㅡ 바다가 좋다던 너는 바다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 * *
오비토는 다른 사람과 함께 낚시하지 않았다. 혼자 하는 걸 더 좋아하기 때문이었는데, 어째선지 카카시라면 같이 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지? 고민해봤지만 답은 역시 나오지 않았다. 마음이 들떴다고는 해도. 충동적이었다. 달은 하늘 높이 떠있었고, 별빛도 반짝였고, 풀숲 귀뚜라미도 울었다. 결국 분위기에 휩쓸렸었다는 어설픈 결론만 내리고 말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커다란 가방을 등에, 낚싯대를 어깨에 메고 한 손엔 미끼가 들어있는 상자를 쥔 오비토가 카카시 숙소의 문을 두드렸다. 잠깐 기다리자 녹슨 문이 천천히 열리는 소리와 함께 카카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이 잠에 취한 듯해 오비토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 하하. 안녕……. 그가 들고 있는 것을 지긋이 응시하던 카카시가 잠긴 목소리로 잠시만, 했다.
“다음 주라고 안 했어?”
“사촌들이 부모님 모시고 뭐, 어디더라, 으음. 아무튼 여행시켜 준다고 올라갔거든.”
아아. 카카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고 있었어?”
“아, 응.”
“안 피곤해? 등대일.”
“피곤할 게 뭐 있어. 불만 껐다가 켜면 되는 건데.”
새벽까지 계속 등대에 있어야 하는 거 아냐? 그럴 리가. 어, 진짜? 가끔 잘 작동하는지만 봐주면 돼. 배에서 내려, 낚시 포인트까지 올라가는 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면서 말을 주고받았다. 대화는 일방적인 오비토의 질문으로 이어나갔고, 카카시가 자의로 자신에 대해 말하지는 않았다. 오비토는 못내 그것이 서운했다.
여기야. 오비토가 자랑스럽게 웃으며 낚싯대와 묵직한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검은색 바위들이 움푹움푹 파인 바닥. 돌섬의 꽤 높은 절벽. 이미 여기저기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 낚싯대를 바다에 드리우고 있었다. 날은 맑았고, 파도도 세지 않았다. 오비토는 만족스러워 큰 소리로 웃었다.
카카시는 바위 끝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파도가 밀려오다가 바위에 부서져 하얀 포말을 일으키는 것을 응시했다. 물이 잠시 빠져나갔나 싶으면 곧이어 다음 파도가 밀려와 다시 거품을 남겼다.
“카카시!”
죽으려고 환장했어?! 카카시의 낚싯대를 손보던 오비토가 다급하게 그를 잡아당겼다. 왜 그래. 금방이라도 뛰어내릴 것 같았단 말이야. 안 그래. 오비토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간 떨어질 뻔했다는 말이 무슨 소린지 뼈저리게 깨달은 그였다.
카카시가 오비토의 옆 작은 의자에 앉았다. 미끼를 낚싯바늘에 끼운 오비토가 그것을 카카시에게 내밀었다. 카카시가 낚싯대를 어색하게 받아들자 오비토는 자신이 직접 시범을 보이겠다며 잘 보라고 일렀다. 가벼운 스냅 한 번에 낚싯줄이 꽤나 멀리 날아갔다. 홱, 뒤돌아보는 그의 눈빛이 반짝였다. 어떻게 하는 건지 알겠어? ……대충. 카카시는 오비토와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그의 행동을 흉내 냈다. 제법 멋들어지게 낚싯줄이 드리워지자 오비토는 카카시에게 엄지를 치켜올렸다. 좀 하잖아.
“아, 왜 이렇게 안 잡혀.”
오비토는 다리를 달달 떨었다. 어라, 하는 카카시의 낮은 음성이 또다시 오비토의 귓가에 날아들었다. 살짝 떨어진 곳에서 낚싯줄을 드리운 카카시는 프로 뺨치는 실력을 뽐내는 중이었다. 청년, 처음 하는 거 맞수? 낚시꾼들은 그가 걸린 고기를 두고 어쩔 줄 모르는 모습에 웃으면서, 바늘에 걸린 우럭을 떼어 내는 것을 도와주었다.
오비토 역시 낚싯대를 던지는 족족 잡아 올리는 카카시의 기행에 혀를 내둘렀지만. 그것도 몇 번. 한 번도 흔들려주질 않는 찌가 오비토의 체면을 깎아 먹었다. 기우뚱. 흔들리는 카카시의 파란색 통이 오비토는 내심 신경 쓰였다.
“또다.”
“뭐야, 잘 잡네. 한 번도 안 해본 거 맞아?”
합. 오비토는 퉁명스럽게 튀어나간 말을 뒤늦게 막아봤지만 이미 그것들은 카카시에게 닿은 후였다. 치졸한 질투심을 보여준 것 같아 오비토의 두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와 줄다리기에 들어간 물고기 때문인지, 알고서 일부러 모른 척해주는 건지 카카시는 오비토의 물음에 건성으로 응, 하고 답 할 뿐이었다. 오비토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결국 마지막에 오비토가 아슬아슬하게 잡아 올린, 커다란 참돔을 마지막으로 낚시는 막을 내렸다. 둘은 제법 묵직한 통을 들고 배에 올랐다. 돌섬에서 빠져나오니 태양의 반 토막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탈탈탈. 엔진 소음이 바닷물이 배에 부딪혀 부서지는 소리와 섞였다.
“매운탕 끓일까.”
뭐? 카카시가 고개를 돌렸다. 부둣가에 배를 대고 밧줄로 꽉 묶어 고정한 오비토는 손을 탁탁 털며 일어섰다. 술도 가져왔는데. 매운탕, 싫어해? ……아니. 유달리 커다란 배낭을 오비토가 탁, 두드렸다. 여기 다 있거든. 씨익. 자신만만하게 웃는 모습이 조금 전 고기를 많이 못 잡았다고 투덜대던 그와는 달라 카카시는 실소했다. 그런 건 왜 들고 다녀. 어음, 원할 때 만들어서 먹으려고? 살짝 올라간 끝에 카카시는 또 슬쩍 미소를 흘렸다.
너 회는 못 먹는 거 같더라고. 적당한 장소를 찾아 배낭을 내리던 오비토가 일렀다. 저번에 저녁 같이 먹었을 때 말이야. 회는 손도 안 대더라. 그래서, 그냥. 이것저것 챙겨왔어. 석양의 끝물이 오비토의 뺨에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고 어둠이 깊이를 더했다. 달그락거리는 작은 소음과 함께 휴대용 가스버너를 꺼내 든 오비토가 모래 바닥에 그것을 내려두었다. 제법 싸늘한 바람이 불어 불길을 꺼트리려 한 탓에 오비토가 대충 바람을 막아서자 카카시가 그 틈에 얼른 불씨를 키웠다. 냄비를 얹고 생수 뚜껑을 따 물을 부었다.
보글보글. 물을 끓을 때까지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눈빛조차도 건네지 않았다. 다만 퍼런 원통에 담긴 물고기가 생기 없는 소리를 냈고, 여느 때와 같은 파도소리. 파도소리. 철썩. 해변에 들어차는 파도소리.
“어째서 이렇게 젊은 나이에 등대지기로 오게 된 거야?”
……바다가 보고 싶어서. 달그락.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대답임에도 오비토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부지런히 두 손을 움직였다. 아니다. 아니었다. 바다가 보고 싶다는 그런 단순한 이유가, 아니다. 양념장도 들고 왔는지 물에 풀어 발갛게 된 탕에선 군침 도는 냄새가 풍겼다. 마지막으로 손질한 우럭을 풍덩 빠트린 오비토다.
“아니야.”
도망친 거야. 카카시가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거렸다. 보글보글. 열기를 품은 거품이 여기저기서 피어올라 터졌다. 그것은 카카시의 부정마저 삼켜버렸다. 도망친 거라고.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파도소리. 저 파도소리.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생각나게 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카카시가 원한 바였다.
“좀 먹어봐.”
오비토가 매운탕을 한 숟갈 떠서 후후 불었다. 그대로 숟가락을 자신에게 들이미는 오비토에 카카시는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남사스럽게. 줘, 내가 먹을게. 응? 뭐, 그래라. 오비토는 흔쾌히 숟가락을 그에게 건네고 소주의 뚜껑을 돌려 땄다. 꽤 부피가 줄어든 배낭에서 종이컵마저 꺼내는 모습에 카카시는 매운탕 국물을 쏟아낼 뻔했다.
양껏 소주를 채운 오비토가 컵을 카카시에게 건넸다. 소주보단 맥주파지만. 카카시는 그것을 받았다. 제 것도 따른 오비토는 건배를 외치더니 카카시에게 벅찬 양을 한 번에 삼켜버렸다. 한두 모금 홀짝인 카카시를 보고 에이, 그러면 안 되지ㅡ, 하고 쭉 삼키길 요구했다. 물론, 카카시는 그것을 묵살했다.
조금, 취기가 돌았다. 오비토는 매운탕을 입안으로 집어넣으며 잘 끓였다고 큰소리쳤다. 카카시도 그것에 동의했다. 몸이 달아올랐고, 속이 달아올랐고, 귓불도 발갛게 달아올랐다. 유난히 고요한 바닷가에서 카카시는 파도소리를 들었다. 무릎을 모았다. 한 번, 의식을 강렬하게 치고 간 파도소리는 무시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어서. 철썩, 쏴아. 철썩, 쏴아. 밤하늘의 어둠을 삼켜버린 바다는 새까맣다.
“……사고였어.”
“응?”
“사고였다고.”
카카시는 고개를 푹 숙였다. 죄책감에 가슴이 아렸다.
* * *
괜찮지? 혹 이상하게 보일까, 몇 번이고 되묻는 린에게 카카시 역시 몇 번이고 예쁘다고 말해주었다. 친구의 결혼식에 가는 그녀였다. 하얀색에 가까운 베이지색 차림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왜?
쭉 뻗은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린은 연신 창밖을 내다보며 웃었다. 라디오의 소리를 조금 올렸다. 술에 취한 채 운전한 건지 비틀거리는 대형차를 미처 피하지 못했다. 급하게 핸들을 꺾었지만 이미 늦었다. 아스팔트 바닥을 짓누르는 날카로운 소음. 카카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카카시! 비명이 그의 고막을 찢고 머릿속을 좀먹었다. 린.
마취 주사를 맞은 것 마냥 둔한 통증. 카카시의 왼쪽 시야는 캄캄했다. 희미하게 들리는 앰뷸런스 소리. 지독히도 현실감이 없었다. 흐릿한 눈앞에 린이 까무룩 에어백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순백은 잔인하리만치 검붉은 색으로 뒤덮였다. 아. 아. 아.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호흡이 이어지지 않았다. 린. 린. 움직이지 않는 손을 뻗었다. 생각뿐인 것은 행동이 될 수 없었고, 목이 쉬어라 내지르는 소리 역시 들리지 않는 외침일 뿐이었다. 축 처진 린의 팔을 따라 핏물이 방울져 흘러내렸다. 시커먼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보며 카카시는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
꺼내기 힘든 얘기였다. 술이 속을 달궜다. 한 번 이어진 영상은 끊이지 않고 기억하기 싫은 것을 내보였다. 흐릿하진 눈앞에 끔찍한 것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비명. 타이어가 도로를 긁는 소리. 쾅, 차체가 인도에 부딪히는 소리. 끈적한 붉은 액체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흉포한 파도소리. 서늘한 바람소리. 그녀를 보지 못했다던 사람들의 수근거림. 망막에, 고막에 박혀 도저히 지워지지 않는 것들이었다. 아직도 보여. 뭐가? 그때, 사고. 린이, 사라진.
병원, 이었는데. 시력을 잃었대. 린이. 피가 그녀의 얼굴을 타고 흘렀어. 다시는 볼 수가 없다고, 의사가 그랬어. 그녀를 데리고 바다에 나갔는데. 내가 계속 돌봤어. 내, 잘못이잖아. 없었어. 잠깐 뭘 사러갔는데. 가끔 맛있는 걸 사주곤 했어. 흔적도 없었어. 정신없이 뒤졌는데. 발자국 하나 없더라. 꿈이었으면 좋겠다. ……린.
오비토는 앞뒤가 없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충 사정을 짐작한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대신 오비토는 창백하게 질린 카카시의 눈을 가려주었다. 흠칫, 떨리는 그의 몸에 오비토는 어색하게 말문을 텄다. 좋아했어? 침묵. 손을 떼니 카카시의 시선은 밑으로 향해있었다. 말할 것처럼 반쯤 열린 입술이 다시 까만 공간을 지웠다.
“울었어?”
“……아니.”
울지 않았어. 카카시는 눈을 감았다. 귓바퀴를 파고드는 파도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오비토는 피워둔 불을 꺼트렸다. 조심스러운 손길이 카카시의 어깨를 다독였다.
02.
날이 추워졌다. 커다란 생수통을 한 손에 든 오비토가 어기적, 어기적 걸음을 옮겼다. 아, 추워라. 몇 걸음 가다 멈추어 서서 손을 호호 불었다.
카카시는 오비토의 태도가 조금 묘하게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같이 낚시를 갔다가 매운탕을 끓이고, 술을 마신 다음 날부터. 혹시 취해 무슨 말을 했나? 드문드문 기억나는 것에는 언제나 파도소리가 끼어있어 그는 더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이불을 개어두고 물을 끓였다. 바람이 세차게 창을 두드렸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카카시는 그것이 오비토라고 짐작했다. 때마침 물이 떨어졌으니, 아마.
얼마 전 오비토가 기름칠을 해두어 문은 아무런 소음 없이 열렸다. 차가운 공기를 이끌고 들어온 오비토의 손에는 어김없이 생수통이 들려있어, 카카시는 웃었다.
“잘 왔어.”
“다 떨어졌지?”
응. 카카시가 대답하며 생수통을 옮겼다. 물 끓였는데, 녹차라도 마실래? 그럴게. 밖에 춥지. 응, 옷 단단히 입고 나가.
제법 친해졌나 보구나. 화단에 물을 주던 마다라가 막 집으로 들어오는 오비토에게 일렀다. 주머니에 두 손을 푹 찔러 넣고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종종걸음으로 들어오던 오비토다. 그렇지, 대꾸하고는 씩 웃으며 집 안으로 들어가는 그를 보며 마다라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노인의 입가에는 어렴풋한 미소가 걸렸다.
늘 저렇게 솔직하면 좋을텐데, 그렇지. 하시라마? 몇 년 전 떠난 친우의 이름을 속으로 불러보며 마다라는 물뿌리개를 기울였다.
* * *
부둣가가 허전했다. 오비토의 배가 없었다. 등대에 올라 불빛을 반짝이길 이틀. 여전히 부둣가는 휑했다.
오비토를 보지 못했느냐, 토비라마가 카카시를 붙잡고 물었다. 그는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술렁이는 가슴은 진정되질 않았다. ……되었다. 곧 돌아오겠지. 돌아선 토비라마의 주먹이 새하얘진 것을 보고 카카시는 입술을 다물었다. 우산에 부딪히는 빗방울의 소리가 사나웠다. 비닐을 뚫을 기세로 퍼붓는 비. 휘몰아치는 바람. 아니겠지. 아니겠지. 아니겠지. 아니겠지. 슬리퍼를 신어 드러난 맨발이, 빗물에 축축이 젖어들었다. 차가웠다.
3일째. 마을 분위기가 수선했다. 오비토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걸 마을 골목 하나만 걸어도 금방 알 수 있었다. 등대의 퓨즈가 나갔다. 갈아 끼우는 내내 손이 떨렸다. 혹시라도 이 순간에 오비토가 불빛을 보지 못하고 딴 길로 가버리면? 제대로 자리를 맞추지 못했다. 자꾸 엇나가는 동안 카카시는 자신의 머리를 박고 싶었다. 멍청아. 이 정도도 제대로 못 한단 말이야? 그래놓고 의사는 어떻게 되려고 했어?
카카시, 네가 놀랄만한 커다란 생선 잡아올 테니까 기대하라고.
리벤지라고 외치며 호기롭게 웃던 오비토. 뇌리에 박힌 과거의 무더기로부터 끌어 올려주는 목소리. 이튿날 쥐도 새도 모르게 배를 타고 떠나버린 그는 아직도 부둣가의 자리를 채우지 못했다.
4일째. 책이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 카카시는 눈을 떴다. ……잠들었나. 며칠 계속 날밤을 새웠더니. 바닥에 너부러진 책과 삐져나온 린의 사진.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하게 웃으며 넓게 흩어진 들판 사이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드문드문 핀 꽃과 잘 어울리는 그녀였다. 린, 어떡하지. 다시는 잃고 싶지 않은데. 여전히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또, 또 바다가. 시커먼 아가리를 쫙 벌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운다.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인 것 같았다. 어두컴컴한 바다로 린을 밀어 넣은 것도. 바위를 부숴버릴 듯 세차게 몰아치던 파도 속으로 오비토를 밀어 넣은 것도. 사실 봤어. 봤다고. 모두가 숨을 죽인 새벽에 오비토가 배를 끌고 나가는 것을 보았다. 말릴 수 있었다. 자신은 언제나처럼 할 일도 없이 등대에 올라 멍청하게 바다를 보고 있었으니까. 그런다고 린이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그런다고. 그런다고.
이상하리만큼 고요한 바다였다. 전조였을까. 오비토가 나가는 것을 보고 잠시 눈을 붙이기 위해 내려갔다. 점검을 위해 다시 등대 위로 올라오는 길은 험난했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묶인 배들은 서로 부딪혀 소음을 내고 있었다. 그의 배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설마. 오비토.
답답함을 못 이겨 등대에 올랐다. 언제 폭풍우가 몰아쳤냐는 듯 기세를 죽이고 화창했다. 시리고 깨끗한 겨울 하늘. 그것을 가로지르는 새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누군가 카카시의 어깨를 툭, 쳤다.
“아, 안녕하세요.”
“안녕 못하구나. 속 썩이는 놈 때문에.”
아주 여기에 눌어붙지 그래. 묵직한 마다라의 한 마디에 카카시는 어색하게 하하,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너 같은 놈 아주 잘 알지. 네? 예전에도 있었어. 너 같은 놈.
“미련하게 등대만 지키다가 갔다.”
선선하게 가을바람은 불었고, 파도는 잔잔했다. 말없이 바다만 내려다보기를 몇 분. ……힘드셨겠어요. 처음엔 그랬지. 지금은 괜찮아. 먼 곳을 쳐다보는 마다라의 눈빛이 부드러웠다. 카카시의 어깨의 툭툭, 치면서 그는 일어났다.
“너는 그러지 마라. 뭔지 모르겠지만 털고 살아.”
“……감사합니다.”
“그놈, 오비토. 돌아올 거다.”
그런 일이 잊을 만하면 생기는 곳이야. 그래도 말이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돌아올 거라고 믿는다. 뒤로 돌아 내려가는 마다라의 등이 노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분위기를 이고 있었다. 카카시는 어렴풋이, 오비토가 왜 사과를 들고 자신을 찾아왔는지 알 것 같았다.
음식에 입을 댈 수 없었다. 울렁거렸다. 무언가를 삼키면 역한 기분에 그대로 게워내고 말았다. 먹은 것이 없어 누런 액체만 쏟아냈다. 목구멍이 썼다. 수돗물로 입을 헹구어도 가시지 않는, 쓰디쓴. 카카시는 축축한 고개를 들었다. 흐릿한 눈앞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이 커다란 소리를 냈다. 함께 밥을 비벼 먹을 때 썼던 양푼이. 텅 빈 그것에 뚝, 물이 떨어졌다. 싱크대를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직도, 넌. 돌아오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직접 배를 몰고 찾아다니고 싶었다. 아직 살아 있을 거라고 믿었다. 작업을 재개한 다른 어부들도 바다에 나가면 혹시나 싶어 한 번씩 애꿎은 길로 빙 둘러온다고 했다. 오비토. 어디야. 돌아와. 기다리고 있어. ……기다리고 있어.
부드러워야 할 매트리스가 너무도 단단했다. 딱딱했다. 엉덩이가 아팠다.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린이 실명했을 때는, 긴 시간이 걸리더라도 다시 세상을 보여주고 싶다는 열망 하나만을 그래도, 잡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의사를 준비했었고. 린은 아예 떠났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 외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정말 아무것도 없다는 것에 카카시는 숨이 막혔다. 무력감에 치가 떨렸다.
* * *
오비토는 불안했다. 우르릉, 낮게 울리는 하늘의 울부짖음이 심상치 않았다. 부둣가에 매어두었던 밧줄을 풀 때만 해도 이렇지 않았는데. 아직 카카시를 놀라게 해줄 만한 것을 잡지 못했다. 이때까지 잡아 온 물고기의 최대 크기를 갱신할 정도는 되어야 했다.
성난 파도가 뱃머리를 때렸다. 확, 넘어온 바닷물이 오비토의 다리를 덮쳤다. 중심을 잡지 못한 그가 휘청였다. 무심코 뻗은 오른팔이 선체 가장자리에 부딪혔다. 아. 충격을 받아낸 팔이 저렸다. 감각이 없는 손가락이 덜덜 떨렸다. 분명 출발할 때 하늘을 확인했다. 썩 좋은 날씨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나빠질 줄은 몰랐다. 아무리 오래 바다와 살아도 예상치 못한 것이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에 오비토는 씁쓸한 웃음을 삼켰다. 더 욕심부리지 말자. 뱃머리를 돌려야할 때다. 결심한 오비토가 조타실로 걸음을 옮기던 순간, 한두 방울씩 내려앉던 빗방울이 우박처럼 세차게 변했다.
번쩍.
새하얗게 점멸된 시야. 벼락이 내렸다. 뒤이어 울리는 둔중한 굉음. 불안한 심장은 진정되질 않았다. 거친 파도와 함께 속이 울렁거렸다. 물로 흥건한 바닥은 미끄러웠다. 해는 검은 구름 뒤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오비토는 파도와 싸웠다. 선체가 뜨기도 하고 부서질 듯 아래로 가라앉기도 했다. 욱신거리는 팔로 바닥에 납작 엎으려 조금이라도 파도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렸다. 비린내가 올라왔다. 바다 위에 떠 있을 때 부정적인 생각을 한 적은 없지만, 지금만큼은 어쩔 수 없이 사고가 제멋대로 행동했다.
돌아갈 수 있을까?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의심하지 마라. 돌아가야 했다.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풀썩 쓰러진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배의 앞머리가 들렸다. 오비토는 다리에 힘을 주지 못하고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쿵. 둔탁한 소리. 눈앞이 새카매졌다. 빛이 잠겼다.
* * *
파도가 바위에 부딪쳤다 물러나기를 반복했다. 카카시는 무릎을 안고 앉아 그 모습을 지켜봤다. 시선을 위로 올렸다.
“……별이 많구나.”
한밤중. 저렇게 많은 별이 하늘에 수놓아져 있었는데. 자신은 칠흑같이 새카만 바다를 바라보기에 바빴다. 우웅. 흐느끼는 것 같은 파도소리가 귀를 막았고, 차가운 바다가 눈을 막았다. 과거의 그림자가 찐득하게 달라붙었다. 5일째. 구름 하나 없는 하늘에 달이 휘영청 떠올랐다. 여전히, 없다.
귀뚜라미가 울었던 것 같다. 마을에서 등대로 향하는 길을 같이 걸었다. 새로운 사람들은 잔뜩 만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낚시 갈래? 자신을 돌아보면서 건네진 말에 당황했었다. 달을 머금었던 눈동자도 생각났다. 맑았던 미소도. 등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손이 차가워졌다. 한 번, 우연히 카카시의 손을 잡은 오비토는 화들짝 놀랐다. 얼음장같이 시렸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열이 많은 편이라며 카카시의 손이 데워질 때까지 그것을 놓지 않았다.
차가워. 손을 맞잡았다. 차가워질 대로 차가워진 손가락이 손등에 닿았다. 온기는 없었다. 시린 것이 손목을 타고 올라가 팔꿈치에 닿았다.
제대로 맞지 않는 슬리퍼를 끌고 제방을 따라 걸었다. 거대한 구조물이 옆에 펼쳐졌다. 카카시가 쳐다보고 있던 바닥에 그림자가 졌다. 그는 고개를 올렸다. 편안한 인상의 남자와 딱딱한 인상의 남자. 카카시는 머릿속으로 그들의 이름을 더듬었다. 아. 카가미 씨, 후가쿠 씨.
“편하게 형이라고 불러. 몇 살 차이도 안 나는데. 카카시라고 했나?”
“네, 형.”
카가미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얘기할 동안, 후가쿠는 ‘몇 살 차이 안 나기는 무슨.’, 하고 중얼거렸다. 지금 주말에 사스케 안 왔다고 기분 안 좋아서 그런 거지? 아닙니다.
말을 주고받는 두 사람 사이에서 카카시는 어색한 미소를 지을 따름이었다. 호탕하게 하하, 웃은 카가미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카카시를 돌아봤다. 좀 괜찮아? 네?
“그 할아범이 네가 오비토 걱정을 많이 한다고 하더라고.”
“……아.”
괜찮아요. 목소리를 쥐어짜 내 겨우 대답했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대답하는 눈동자에는 불안이 뿌리내려있었다. 걱정, 안되시나요? 어쩌면 가장 형식적이고, 가장 아플 말을 카카시는 도무지 꺼낼 수 없었다. 그는 그저 입꼬리를 올렸다. 후가쿠는 카카시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가끔 놀러 와. 그래, 카카시. ……네, 그럴게요.
“오비토가 너 많이 좋아하는 것 같더라. 낚시도 같이 갔다며. 그 녀석 무슨 일이 있어도 낚시는 혼자 가고 싶어 했거든.”
“그런, 가요.”
그럼. 물론이지. 아, 이만 가볼게. 나중에 꼭 놀러 오렴. 들어가세요. 제방 사이로 들이닥친 바닷물이 짠 내를 풍겼다.
그런 일이 잊을 만하면 생기는 곳이야.
마다라가 한 말이 선명하게 카카시의 귓가를 스쳤다. 그래서일까. 그래서 사람들은 무뎌진 걸까. 아니, 그런 척하는 걸까. 카카시는 천천히, 느리게, 눈을 감았다.
깜빡. 눈을 떴다. 꽃 자수가 새겨진 두꺼운 이불이 보였다. 얇은 이불을 덮기에는 이제 너무 춥다며 오비토가 준 것이었다. 몸을 일으키자 작은 시계가 숫자 12를 막 지나고 있었다. 사람 사는 곳에 시계가 없어야 되겠냐며 오비토가 사준 것이었다. 손목시계가 있어 사양했는데도 막무가내였다.
“얼마 못 잤네.”
혼잣말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늘 떠들어 주던 상대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적막함을 참을 수 없어 카카시는 문자를 만들어냈다. 작은 냉장고를 열어 물병을 꺼냈다. 잔에 물을 따르면서 쳐다본 싱크대의 한편에는 비닐봉지에 가득 쌓인 귤껍질이 있었다. 그것 역시, 제철이라고 오비토가 준 것이었다. 넘어가지 않는 밥 대신에 먹고 있었다. 아직 박스 안에 두어 개 남아 있을 테다. 혹 문드러졌을까 조심스레 들어 올린 귤은 상한 군데 하나 없이 선명한 빛깔을 띠고 있어, 카카시는 안심하고 껍질을 깠다. 손가락에 귤의 향이 스몄다.
오비토를 만난 지 이제 겨우 한 달 반. 낚시를 같이 간 이후로 대화도 많아지고 얼굴 보는 일도 많아졌다. 동시에 카카시가 홀로 바다를 보는 시간도 줄어들었다. 대신 같이 점심을 먹고, 밭도 가꾸었다. 물론 낚시도 갔다. 여전히 카카시가 우위였다.
귤 한 알을 입에 집어넣었다. 시다. 맛없으면 말하라고 큰소리치던 얼굴이 지나갔다. 오비토. 칼칼한 목으로 억지로 그것을 삼켰다. 쓰라렸다. 순식간에 역함이 밀려왔다. 욱, 하고 싱크대에 뱉어낸 것을 내려보냈다. 차가운 수돗물이 줄줄 흘렀다. 답답해. 갑갑증이 사라지지 않아. 이제 네가 준 것마저 먹지 못해. 가슴에 가득 들어찬 덩어리가 빠져나가지 않았다. 모래를 가져갔다가 다시 되돌려놓는 파도처럼. 언제나 제자리걸음이었다. 그것을 한 움큼 씩 가져가 주던 것은 오비토였다. ……아. 그래서.
좋아했어?
눈물이 흘렀다. 새빨간, 붉은 피와 함께 사라졌을 거라고 믿었던 것이. 뜨거운 덩어리가 퍽, 터졌다. 가슴 속에서 울컥울컥 솟아오르는 것을 카카시는 그대로 뱉었다. 바닷물만큼 짠, 그러나 따뜻한. 눈앞이 흐릿하고 벌려진 입은 괴로움을 토했다. 주저앉아 가슴을 쥐어뜯었다. 터진 덩어리의 조각이 구석구석 들러붙어 아프게 했다. 보고 싶어. 린. 미안해. 아파. 보고 싶어. 보고 싶어. 아파. 오비토. 아파. 보고 싶어. 어디야. 죽지 마. 이제 더 이상.
“죽지 마…….”
제발.
* * *
눈을 떴다. 멀리서 빛이 반짝였다.
* * *
투둑. 작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카카시는 두꺼운 이불을 치우고 일어났다. 멍한 눈앞에 마지막 남은 귤이 보였다. 그는 문을 열었다.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술에 취한 오비토가 깜빡하고 놓아둔 슬리퍼를 신었다. 바꿔 신고 간 운동화는 언제 돌려줄 생각인지. 도대체, 언제. 볼이 약간 큰 신발을 끌고 우산을 들었다. 등대를 보러 가야 했다. 오비토가 사라지고 나서 등대를 확인하는 시간이 늘었다. 드러난 발가락에 닿는 물방울이 차가웠다.
차갑게 식은 대기는 등대 안으로도 스며들어, 옷을 두껍게 껴입었는데도 카카시는 몸을 떨었다. 입김을 부니 하얗게, 선연했다. 깜빡, 깜빡. 등대는 비를 뚫고 제 할 일을 다 하고 있었다. 팡. 우산을 펼치고 잠시 회랑에 섰다. 금방 지나갈 비인지 파도는 심하게 올라가지 않았다. 문득, 익숙한 듯 시야를 옮기자 부둣가가 보였다.
아.
우산을 떨어트렸다. 잘못 본 걸까. 설마. 다른 사람의 배는 아니고? 수많은 물음과 의심 속에서 카카시는 달렸다. 속눈썹에 떨어지는, 작은 빗방울을 헤치고 그는 달렸다. 부둣가가 가까워졌다. 숨은 차올랐고, 다리는 감각이 무뎌졌다. 차가운 빗속. 카카시의 몸이 달아올랐다. 비정상일 정도로 빠르게 뛰는 심장의 소리가 크게 울렸다. 조금만. 조금만 더. 내리막길을 뛰어 내려갔다.
진짜다. 오비토의 배가 맞았다. 그가 구경시켜준다며 자랑스럽게 보여준 그 배였다. 확신이 서자마자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털썩. 주저앉았다. 덧대어둔 가장자리 판의 반절이 나가떨어진 배. 오비토가 직접 새겼다던 그의 이름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지만. 카카시는 알 수 있었다. 오비토. 오비토의 배.
“오비토!”
매어두지 않은 배는 금방이라도 파도에 실려 다시 떠나버릴 것만 같았다.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리는 다리를 억지로 붙들고 카카시는 배 앞에서 외쳤다. 카카시? 뒤쪽에서 들려온 익숙하고 낯선 음성에 카카시는 몸을 돌렸다.
ㅡ 오비토가, 있었다.
너무 간절한 나머지, 만들어낸 환영이 아닐까. 손을 뻗어 그의 뺨을 감쌌다. 분명하게 느껴지는 감각에 울컥, 무언가가 가슴 속에서 치솟아 올랐다. 축축하게 젖은 옷, 군데군데 하얗게 일어난 얼굴. 그래도 여전한 환한 미소. 다녀왔어, 하고 웃는 그를 껴안았다. 카, 카카시? 아야. 아야. 당황하다 신음을 뱉는 오비토에 카카시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아파?, 하고 물었다. 오비토는 오른팔을 가리키며 착잡한 듯 미소 지었다. 부딪혔는데, 삔 것 같아. 한숨을 쉬었다. 맞잡은 두 손은 너무 차가웠다. 그것에 놀라 가만히 손을 붙잡고 있자 오비토가 따뜻하네, 하며 다시 웃었다.
“어, 떻게.”
“조난당한 거지, 뭐. 비 오는데 돌아가서 얘기할래?”
멍청아. 멍청아……. 왜 나갔던 거야. 걱정했잖아. 카카시, 울어? 안 울어. 하늘에서 내리는 것이 뺨을 때렸다. 호선을 그리며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비야, 비라고. 정말이야. 알았어, 알았어.
E
고요했다. 말이 없었다. 마다라에게 이미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오비토는 식은땀을 흘렸다. 카카시는 그와 조금 떨어져 앉아 귤을 까고 있었다. 핼쓱한 그의 얼굴이 안쓰러워 오비토는 속으로 씁쓸함을 삼켰다. 본의 아니게 그의 상처를 쑤신 셈이 되어버렸다. 그, 있잖아.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먹을 것도 충분히 있었고, 엔진도 망가지지 않았고 말이야. 카카시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비토는 불편한 오른손 대신 왼손으로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 그래.
“상어를 잡았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며 카카시가 눈을 치켜떴다. 진짜야. 못 믿겠으면 배에 가볼래? 자신만만한 태도와는 달리 조금 떨리는 목소리다. 자신을 빗겨가 공중으로 떨어지는 시선에 카카시는 ‘아니, 됐어.’ 대꾸하며 건넨 귤을 오비토가 받아들었다. 네가 준 거. 시더라. 아, 그래? 이번엔 단 거로 가져다줄게. 반으로 갈라 한꺼번에 집어넣은 그가 몸을 떨었다. 진짜 시네.
“다시는 그런 날에 배 타고 나가지 마.”
“……많이 걱정했어?”
“당연한 거 아니야? 나는 네가…….”
죽은 줄만 알았단 말이야. 차마 잇지 못한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오비토는 붉어진 카카시의 눈가를 못 본 척했다.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게. 미안해, 카카시. 길게 호흡을 끈 카카시가 오비토를 마주 봤다. 조금의 울음기와, 그럼에도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동자에 오비토는 입술을 다물었다. 시계의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시선을 조금 내린 카카시가 입을 열었다. 메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오비토는 남은 귤을 손에 쥔 채 카카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는 더 이상 좋아하는 사람들을 잃고 싶지 않아.”
“……응.”
귤이 따뜻했다. 다행이야.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야. 결국 카카시가 고개를 푹 숙였다. 새하얀 손을 오비토가 잡았다. 여전히 차가운 손이었다. 꽉 잡았다. 온기가, 다짐이, 전해지도록.
ㅡ 파도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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